살다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. 내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거짓으로 나를 짓누르는 이들을 마주하면 마음속에는 정의라는 칼날이 솟아난다. 그들을 단죄하고 싶은 마음, 그들이 뿌린 대로 거두기를 바라는 간절함은 인간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본능이다. 하지만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이 깊어질수록 내 삶의 중심은 어느새 내가 아닌 가해자에게로 옮겨간다. 그가 무엇을 하는지, 여전히 잘 살고 있는지 감시하며 내 감정의 기복을 그의 행보에 맡겨버리는 것이다.

미움은 가장 지독한 형태의 결속이다. 내가 그를 증오하는 동안 나는 그가 만든 고통의 굴레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다. 결국 증오라는 감옥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용서다. 용서는 상대에게 면죄부를 주는 관대한 행위이기 이전에 그 사람과 연결된 부정적인 에너지의 끈을 스스로 끊어내는 단호한 자기 구원이다.
우리는 흔히 내가 용서하면 가해자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을까 봐 두려워한다.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용서는 심판의 포기가 아니라 심판 주체를 하나님께 이양하는 것이다. 내 손에 묻은 피와 내 마음의 독기를 걷어내고 공의로운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그 사건의 최종 판결을 맡겨드리는 것이다.
내가 심판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한 나는 결코 평안할 수 없다. 그 자리는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뜨겁고 무거운 자리이기 때문이다.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우리가 그 무거운 칼자루를 휘두르다 스스로 다치지 않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배려이기도 하다.

용서를 선택한다고 해서 상처가 곧바로 아무는 것은 아니다. 여전히 흉터는 남고 때때로 통증이 찾아올 수도 있다. 하지만 더 이상 그 통증이 내 삶을 지배하게 두지 않겠다는 결단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.
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조롱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시선은 가해자의 악함보다 그 죄의 비참함을 먼저 꿰뚫어 보셨다. 그 높은 시선을 아주 조금이라도 빌려올 수 있다면 우리는 비로소 증오의 감옥 문을 열고 나와 나에게 주어진 고귀한 오늘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다. 용서는 타인을 위한 선심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서 다시 숨 쉬고 싶은 자의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선택이다.
